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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 | 이관세 소장

이관세(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소장)

거익태산(去益泰山) 

한겨울의 추위와 어둠이 점점 멀어지고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봄이 찾아오고 있다. 겨울이 지나면 응당 봄이 오건만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있고, 남북관계는 거익태산이다. 2023년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북남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입장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절박한 요구를 제기”하며 “북남관계를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했다. 이어진 제14기 제10차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지난 80년간의 남북관계사에 종지부를 찍고 한반도에 병존하는 두 개 국가를 인정한 기초 위에서 북한의 대남정책을 새롭게 법화하였다.”라고 선언하며, 남북관계 틀을 바꾸는 헌법 개정을 지시했다. 또한,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에서까지 통일과 민족 관련 단어들을 금지시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북한 평양 지하철에서 ‘통일역’이 통일‘이 빠진 ’역‘으로만 표시된 것이 확인되었다. 북한에서 통일과 민족의 개념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실체가 없던 긴장이 이렇게 가시화된 것은 급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다.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어쩌면 한국전쟁 직후부터 켜켜이 쌓여 온 것이 우리 앞을 가로막은 태산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산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북한의 통일·대남정책 변화 연원과 함의 

1960년대부터 북한에서는 연방제를 주장해 왔으며 그 완성형이 1980년 10월 10일 제6차 당대회 보고에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설방안’이다. 1991년 김일성 주석이 신년사를 통해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 형태를 추가로 제시함에 따라 완성된 통일국가 형태의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이 방안은 ‘남북공존’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구체화한 이념으로 1993년 ‘조국통일을 위한 전 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제시했다. 북한은 이번 발표 전까지 ▲7·4남북공동성명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전 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조국통일 3대 헌장’으로 규정했으며, 이를 위한 기념탑도 세웠다.

 
<북한의 대남정책 및 남북관계 변화 주요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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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권력 세습의 정당성을 ‘유훈통치’에서 찾는다. 이 유훈통치의 기본 속성은 ‘불변성’과 ‘연속성’이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 17일 사망 후 김일성과 김정일의 통치노선과 위업을 그대로 받아 안고 수행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따라서 “민족역사에서 통일·화해·동족 개념을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라고 한 것은 통일·대남 정책의 획기적인 전환이다. 북한은 적대적인 남북관계 재정립을 통해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매우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처사인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헌법 개정 지시뿐만 아니라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철거, 경의선 북측 구간 회복 불능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의 대남기구 폐지, 통일용어 지우기, 한반도 지도에서 남쪽 삭제, 고강도 미사일 개발 등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실질적 조치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해 한반도 정세의 구조적·환경적 요인도 악화일로인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후·식량·에너지·보건, 미·중의 기술·패권 대결, 공급망 재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발발 등 불확실성의 국제정세 속에서 북한은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과도기적 상황을 기회로 활용하여 핵무력 강화에 집중하는 한편,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개선 대신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방위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북·러 간의 군사·경제적 협력 강화는 북한의 국가전략이 기존의 대미외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 전환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군사적 위협 수준도 더욱 고도화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즉, 남북 간 특수성을 부정하고 한국을 유사시 평정의 대상이라고 한 것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핵 사용 가능성을 포함하여 현재의 정세를 주도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 정세 안정을 위해서 북·중·러 밀착을 통한 냉전적 대립 구조가 심화하여 군사적 긴장이 초래되지 않도록 대응 방안을 강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북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을 통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남북 간 대결은 ‘군사적 대결’의 탈을 쓴 ‘정치적 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결·대립의 시대가 장기화 되면서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의 특수관계를 부정·폐기함에 따라 이제 민족끼리의 대화와 경제협력으로 비핵화를 달성하는 방안은 난관에 처해있음을 냉정히 인식하고 새로운 전략 구상과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한 것은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며, 이로 인해 남북관계를 국가 간 외교로 접근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특수관계가 내포한 ’두 개의 국가‘라는 현실과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명의 이중성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새로운 통일론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과거 동서독의 사례는 통일에 의한 분단 극복을 상상함에 있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동독은 1960년대 후반 통일노선을 포기하고 두 국가론과 두 민족론을 표방하였다. 이에 대해 서독은 명목상의 ’통일‘ 및 ’1민족 2국가론‘을 유지하면서 현실적으로 조응하는 양면전략을 구사하였다. 즉, 서독은 동독의 민족 분리 시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독일 민족의 단일성과 통일 지향성을 고수하며 교류·협력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1989년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같은 급변 사태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은 상호 간 적대감이나 위화감 없이 통일을 완성하였다. 

동서독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개의 국가로 상호 인정될지언정, 분단의 극복 없이 관계 정상화는 불가능하다. 분단된 한쪽이 두 국가론, 두 민족론을 선포해 분단의 공고화ㆍ영구화를 시도해도, 다른 한쪽이 민족 단일성과 통일에 대한 지향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노력을 해나간다면 평화통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과 전후 질서가 국제적 힘의 충돌과 협력으로 결정된 상황에서 민족 특수성을 부정하면 한반도 운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 유지는 어렵다. 남북은 끊임없이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특수관계에 있으며 국가적 실체로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객관적 현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존하는 정치적 실체로서 북한과 동족의 북한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 따라서 국가행위자로서 북한 그리고 동족으로서 북한에 대한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따라서, 북한의 통일 노선 포기와 같은 변화된 시대적 조건과 상황을 감안하면서 미래지향적 통일역량을 지속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만 통일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 완성을 위한 주도권을 확보하여 역사적ㆍ헌법적 책무인 통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정세에 있어 2024년은 매우 중요하다. 두 개 국가를 선포한 북한이 대내 통치 기반 공고화와 핵·미사일 무력의 성과 달성을 위해 중국과 러시아와의 협력 긴밀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이를 토대로 11월 미국 대선 결과를 감안하여 미국과 새로운 담판을 지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한국을 적대국가로 재개념화함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국익에 맞게 적대 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리셋하는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남북관계 재정립 모색과 함께 전쟁 재발 방지 및 핵사용 감소를 위한 전략·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지혜와 결단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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